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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건 → 요렇게!

너의 자소서엔 네가 없다.

대학교 조별 과제에서~

호주로 교환 학생을 가서~

대외활동을 통해~

공모전 1위를 수상했고~

OO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면서~


내가 본 대부분의 자소서 서론은 위 문장들로 시작된다. 

질문이 5개라면 저기서 5개 스토리를 어떻게든 욱여넣어 돌려 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뒤에 나오는 내용들도 얼추 비슷. 

첨삭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왜 자소서를 쓰라고 하면 다들 대학교 3~4학년 때 경험했던 일들만 쓸까? 그것도 다 자랑하듯이 포장해서...


물론, 이해가 간다. 어떻게 해서든 내가 열심히 했던 것을 보여주고 싶을 테니. (나도 그랬고)

하지만 25~30년의 삶을 단 2~3년의 모습으로만 평가할 수 있을까?

경력직에 지원한 것이 아니라면 잘했던 일(스펙)들로만 나를 너무 포장할 필요 없다.


"OO아, 왜 다 네 자랑만 있어?"

"형 그런데 뭔가 자꾸 특별한 경험을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면접 때도 그걸로 물어보니까.."

"맞아. 내 말은, 전부 다 그러지는 않아도 된다는 거야. 문제에 따라서는 중.고딩 이야기를 해도 돼. 그게 지금의 너를 만들었다면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편이 훨씬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거지"

"알겠습니다. 해볼게요."


내가 응원하는 한 아나운서 지망생의 자소서를 직접 보자. 뭐가 더 좋은지. (아래)


이런건→

제겐 15살 터울의 친구가 있습니다. 재작년 서울광장스케이트장에서 DJ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하루 평균 100~200개의 사연을 소개해주었지만 정작 사연이 너무 많아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은 손에 꼽혔습니다. 어느 날 DJ부스로 한 아이가 수줍게 떡볶이를 건네주며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매일 사연 소개해줘서 고마워요 DJ형.”

 떡볶이를 계기로 친해진 저희는 사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DJ부스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맞벌이 부모님을 둔 그 친구는 겨울방학의 심심함을 달래고자 매일같이 여동생과 함께 스케이트장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DJ형이 사연을 읽어주기만 해도 제 얘기를 들어주는 것 같아요.” 단지 일상을 들어주는 것이 누군가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일의 소중함은 어릴 적에 배우게 됐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지역구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독거노인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외로움을 달래주자는 취지였습니다. 어린이 리포터로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경청했을 뿐이지만 금세 할머니의 눈시울은 손주 생각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방송 후 할머니를 다시 찾아 뵈었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짧은 분량의 방송을 비디오로 녹화해 수 차례 저와 당신의 모습을 돌려 보셨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학시절엔 ‘공감능력’을 주제로 유튜브 프로그램을 기획한 적도 있습니다. 모르는 상대와 통화로 하루의 일상을 공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피실험자들이 상대의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통화를 마친 후엔 하루를 위로 받는 느낌이 든다고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 사이 제 별명은 ‘마음의 소리’입니다. 어떠한 고민을 토로해도 잘 들어준다며 붙여진 별명입니다. 저의 음성이 시청자에게 편안함을 선물할 수 있는 공감능력 높은 아나운서가 되고 싶습니다. 


요렇게!

질풍노도의 중학교 2학년 시절, 첫 짝꿍을 제비뽑기로 뽑을 때였습니다. 새로운 학기를 함께 할 첫 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에 설렜고 원하는 친구가 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제 첫 짝꿍은 ‘틱 장애’가 있는 친구였습니다. 많은 걱정이 앞섰습니다. 친구들의 시선은 물론, 반복적으로 펜을 위로 던지는 친구의 행동 때문에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의 어머니께서는 매일같이 학교에 찾아오셨습니다. 매번 간식을 주시며 “현선이 좀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가 찾아오면 제 짝은 자리를 비웠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어머니가 찾아온 날, 저는 우연히 복도에서 모자의 말다툼을 듣게 됐습니다. 다음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친구는 울면서 대답했습니다. “나는 잘 하고 있는데 왜 자꾸 찾아오는지 모르겠어. 엄마가 미워”. 한참 동안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펜을 위로 던지는 행동이 더는 우스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낀 하루였습니다.

 경청은 온전히 화자가 중심이 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많은 친구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앞에 나서서 ‘대화를 시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대화의 물꼬를 튼 후엔 상대방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나’를 그 안에 녹여내는 노력을 했습니다.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 괜찮아’는 ‘걱정하지마, 잘될 거야’보다 더욱 큰 위로가 됩니다. 대학시절 심리학에 대해 학습한 일도 경청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시 만난 행복전도사께서는 ‘들쑥날쑥한 대화보다 잔잔한 안정을 주는 대화가 좋다’라며 다시금 경청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방송 프로그램은 언제나 시청자를 중심으로 기획됩니다. 결국 시청자가 주된 화자이기에 ‘경청’은 아나운서의 핵심 역량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편견을 버리고 진정성 있게 시청자의 이야기에 집중할 때 좋은 방송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포근한 미소와 대화로 모두의 마음을 안을 수 있는 아나운서가 되겠습니다.